평화와 풍요를 품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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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주영 (203.♡.251.12) 작성일 21-10-29 11:54 조회 8,639회 댓글 2건본문
“펀치볼, 매우 낯선 지명이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고, 삼엄한 경계 속에 갇힌 곳, 분단의 냄새가 짙게 나는 남녘 땅 최북단에 있는 군사시설이다. 미군 종군기자가 자기 나라의 화채그릇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여준 ‘해안분지’라는 것을 몰랐다. 그 펀치볼에서 남쪽으로 사십리 남짓 떨어진 곳에 짐을 풀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제군 서화면에 속한 마을이지만, 펀치볼까지 가기가, 그것이 속한 양구군의 주읍 보다 훨씬 가깝다. 사상 최고의 혹서라고 떠는 호들갑은, 숫자를 보고 부리는 엄살이지 싶다. 제법 북쪽이지만 이곳의 여름은 견디기 힘들 만큼 덥다.” (1974년 8월,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에서)
대학 2학년 여름방학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던 곳의 추억을 적은 글의 일부다. 바로 턱밑에서 한 달을 지내면서도 가보지 못한 땅을 무려 47년 만에 밟았다. 봉사도 사회활동도 모두 물려주고 나니 엄습하는 허전함이 작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쥐꼬리만큼 남은 사업마저 목을 조르는 코로나의 기습이 야속하기만 하다. ‘역설의 신비’라는 거창한 표현을 아끼고 싶지 않다. 새로운 일상을 엮어 여생을 준비하려 발버둥치던 ‘지공 거사’의 심장이 이 예쁜 분지를 뒤덮던 포화처럼 폭발을 거듭한다.
10개월째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오른, 그 어느 것과도 닮지 않은 산의 모습을 보았다. 얌전한 화채그릇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들이 모두 천 미터를 훌쩍 넘지만 전혀 날카롭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그 그릇이 품은 자애와 관용이 어머니의 치마폭 같이 수많은 생명을 가득 담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의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영글어 가는 사과의 탐스런 모습이 풍요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었다. 내 고향 앞바다만큼 넓은 밭에 심겨진 대파와 무시래기의 결실이 얼마나 풍성한지 헤아릴 길 없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꽤 오랫동안 시리고 메말랐던 내 가슴이 따스한 가을볕으로 포근하게 데워진다.
“언제 다시 올 것인가?” 구질맞은 신세타령을 접는다. 언제고 배낭만 꾸리면 올 수 있다는 용기를 찾았다. 전쟁과 분열의 역사가 평화와 화합의 의미를 더 깊게 새겨놓은 땅. 그곳에 가면 힘차게 뛰던 내 젊은 가슴의 박동을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올리브 산에 오르시어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린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 대암산, 그 곳을 오르는 날 나도 그 기도를 바치고 싶다.